미술 작품 ‘무제’, 모두 같은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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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연달아 만나는 ‘무제(Untitled)’는 정말 작가가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는 뜻일까? 어떤 작품에서는 해석을 열어 두려는 선택이지만, 모든 무제를 그렇게 읽을 수는 없다. 같은 표기가 작가의 정식 제목일 수도 있고, 원제가 확인되지 않은 작품에 기관이 붙인 기록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괄호·날짜·색상·번호가 붙었다면 한 번 더 나눠 봐야 한다. 연작을 구별하는 제목 요소인지, 제목 밖의 제작 정보나 등록번호인지는 표기 위치와 제목 출처에 따라 달라진다.

‘해석의 자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제목은 작품을 보기 전에 인물·장소·감정을 특정해 감상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작가가 이를 피하고 색, 형태, 재료나 제작 과정에 시선을 남겨 두려고 ‘무제’를 택하는 경우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문신 회고전 연계 교육 자료는 문신이 관객의 추상과 상상을 열어 두기 위해 무제를 즐겨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권영우의 작품과 전시를 다룬 기록도 무제를 한지의 물성과 구성 방법에 주의를 돌리는 작업관과 연결한다.

두 사례는 의도적으로 ‘무제’를 택한 작가가 있다는 근거다. 그러나 한 작가의 이유를 다른 작품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제목이 전해지지 않았거나 기관의 기록 과정에서 명칭이 생긴 작품도 있으므로, ‘무제니까 자유롭게 보라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기관별 지침을 대조하면 차이가 드러난다

Wellcome Collection의 소장품 메타데이터 지침은 작가나 권위 있는 출처가 준 제목, 작품에 적힌 제목, 기록자가 만든 설명형 제목을 구분한다. 작가가 ‘Untitled’를 제목으로 지정했다면 그대로 적지만, 주어진 제목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Untitled’를 자동 부여하지 말라고 안내한다.

Terra Foundation의 작품 라벨 안내에서는 작가의 제목을 알 수 없을 때 큐레이터가 ‘Untitled’, ‘Title Unknown’ 또는 설명형 제목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Getty의 미술품 기술 표준도 작가나 소장기관이 실제로 부여한 명칭이라면 ‘Untitled’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자료가 충돌하는 지점은 ‘Untitled’를 언제 기록명으로 쓰느냐이다. Wellcome Collection은 제목이 없을 때 자동으로 붙이지 않지만, Terra Foundation과 Getty의 자료에는 기관이 붙인 ‘Untitled’가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캡션의 문자열만 보고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확정할 수 없다.

관람객이 마주치는 가능성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Untitled’ 자체가 작가가 선택한 정식 제목일 수 있다. 그 의도는 작가의 발언이나 작품 기록에서 확인해야 한다.
  2. 원제가 확인되지 않아 ‘제목 미상’, 설명형 제목 또는 기관이 부여한 ‘Untitled’로 기록됐을 수 있다. 이 경우 ‘무제’만으로 작가의 미학을 설명할 수 없다.
  3. ‘Untitled’에 괄호·날짜·색상·번호가 붙을 수 있다. 이 정보는 제목의 일부일 수도 있고 제작연도나 등록번호처럼 제목 밖의 식별 정보일 수도 있다.
무제가 작가의 정식 제목, 원제 미상 작품의 기록명, 날짜·번호가 붙은 식별 제목으로 나뉘는 구조
같은 ‘무제’도 명명 주체와 기록 상태에 따라 세 갈래로 나뉜다.

제목도 여러 기록을 거쳐 달라질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 카탈로그 레조네의 제목 편찬 지침을 보면 같은 작품의 명칭이 작가 메모, 스튜디오 카드, 딜러 재고, 갤러리와 미술관 라벨을 거치며 달라질 수 있다. 편찬자는 이 자료들을 대조해 주제목과 대체 제목, 각 제목의 출처를 함께 남긴다. 작가가 이름을 붙이지 않은 작품에 설명형 제목을 만들기도 하고, 스튜디오에서 쓰던 ‘Untitled’를 유지하기도 한다.

이 방식이 모든 작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목이 처음부터 고정된 한 줄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보여 준다. 제작 뒤 스튜디오, 유통, 소장과 연구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출처와 편찬 판단이 제목 기록에 쌓인다.

캡션에서 확인할 순서

관람 현장에서 모든 명명 이력을 알아낼 수는 없다. 다음 순서로 읽으면 확인된 사실과 추정을 섞을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1. 작가명과 제목 표기를 함께 본다. ‘무제’, ‘제목 미상’, 괄호나 대괄호로 표시한 설명형 제목은 같은 표기가 아니다. 다만 기호의 뜻은 기관마다 다를 수 있다.
  2. 제작연도와 제목 속 숫자의 위치를 나눈다. 제목 줄 안의 ‘1977’과 별도 제작연도 칸의 ‘1977’은 역할이 다를 수 있다.
  3. 재료와 크기를 확인한다. 같은 작가의 무제 작품 여러 점을 구별하는 기본 정보다.
  4. 소장처와 등록번호를 찾는다. 등록번호는 작품 제목이 아니라 소장품을 식별하는 기관의 값이다.
  5. 명명 주체를 확정해야 한다면 소장처 온라인 레코드의 제목 출처와 대체 제목, 작가 재단 자료나 카탈로그 레조네를 확인한다. 공개 레코드에 제목 출처가 없다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무제’라고 했다는 판단은 보류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이름의 기술’ 전시를 다룬 보도에 따르면 좌표·날짜·번호처럼 보이는 제목도 제작 정보나 식별 체계이면서 해석 장치가 될 수 있다. 보도에 나온 37점은 이 기획전의 선정 작품 수이므로 전체 소장품에서 무제가 차지하는 비율로 읽어서는 안 된다.

‘무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무제’라는 문자열만으로 작가의 의도와 기록 상태를 가를 수는 없다. 작품을 먼저 본 뒤 제목 표기, 제작연도, 재료·크기, 소장처·등록번호를 차례로 읽는다. 그다음 제목 출처와 대체 제목이 공개돼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출처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결론도 그 범위에 맞춰야 한다. ‘작가가 선택한 무제일 가능성’과 ‘원제 미상 작품의 기관 기록명일 가능성’을 함께 남기는 편이 정확하다. 괄호·날짜·번호 역시 제목 줄과 별도 정보 칸을 구분하기 전에는 제목의 일부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참고 자료

  1. 국립현대미술관, 「[온라인] 전시를 말하다 ‹무제 워크숍: 제목 짓기›」
  2. Wellcome Collection, 「Title/Brief Description」
  3. Getty Research Institute, 「Titles or Names」
  4.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How to Read an Art Label」
  5. Roy Lichtenstein Foundation, 「Guide to the Catalogue: Titles」
  6. 뉴시스, 「‘종이 화가’ 권영우, 작품 제목 ‘무제’인 이유」
  7. 동아일보, 「작품 제목이 왜 ‘무제’?」